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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성찬례 성서정과

2013년 10월 20일 (연중 29주일) 성서정과와 강론초록

 

 

2013년 10월 20일 (연중 29주일) 성경말씀 / 대구성당축성

 

예레 31:27-34

27 앞으로 이런 날이 오리라.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을 사람이나 짐승 할 것 없이 씨를 뿌려 농사짓듯이 불어나게 하리라.
28 이전에는 자나깨나 이 백성을 뽑고 부수고 허물고 멸하고 해치기만 하였으나, 그만큼 이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세우며 심어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29 그 날이 오면,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30 죽을 사람은 죄지은 그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들어라.
33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34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시편 119:97-104

97 당신의 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 자나 깨나 나는 그 말씀을 되새깁니다.
98 당신은 내편이 되시어 계명을 내게 주시고, ◯ 원수들보다 더 지혜롭게 만드십니다.
99 당신의 언약을 되새김으로 ◯ 나의 모든 스승보다도 더 현명해지리이다.
100 당신의 법령들을 지킴으로 ◯ 원로들보다도 더 슬기로와지리이다.
101 온갖 나쁜길에서 발길을 돌리리니 ◯ 당신의 말씀대로 살기위함입니다.
102 당신의 결정 거역하지 않으리니 ◯ 당신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옵니다.
103 당신 약속의 말씀은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 내 입에는꿀보다도 더 답니다.
104 내가 모든 거짓된 길을 역겨워하오니, ◯ 당신의 법령을 깨우쳐 슬기를 얻었기 때문이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디모 3:14-4:5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켜 나가시오. 그대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그 진리를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그대도 기억하다시피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익혀왔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16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17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1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과 군림하실 것을 믿고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2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

 

루가 18:1-8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2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3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4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5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8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본기도> 주 하느님, 주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언제나 보살피시고 지켜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자 (루가 18:1-8)

 

오늘 복음서의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 앞부분에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 계속됩니다.(루가17:20절 이하). 이 맥락을 잘 살피면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소원성취를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을 기다리는 신자의 “종말론적 삶의 태도”를 가르치십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임을, 신앙생활이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용기를 잃지 않는 일”임을 알려주십니다.


비유 속의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 절박하게 올바른 판결을 구하지만 “고약한 재판관”은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이 상황은 비유를 위한 설정 이전에, 당시와 오늘날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고통스럽게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고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믿음의 대가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된다는 동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 억울함이 없는 세상, 한맺힌 억울함이 모두 풀리고, 더 이상 고약한 재판관이 없는 세상입니다. 택하신 백성의 부르짖음에 대해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일,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일입니다.

생각하면 “억울함”이 세상살이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세상의 죄와 고통은 바로 억울함의 원인이고 또 결과입니다. 억울함 없는 인생살이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억울할 때 우리의 기도는 오로지 하느님을 향하게 되고 하느님께만 의지하게 됩니다. 시편의 탄원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그 억울함을 아뢰는 마음, 하느님께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다른 이를 억울하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분별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고 주께서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하느님나라를 진실로 원합니까?  하느님의 품 안에서 나와 이웃, 모든 이의 눈물이 씻겨지는 세상이 하느님나라입니다. 우리는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다른 이의 눈물을 보며 간절히 하느님나라를 기원합니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 욕망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억울한 이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어지는 세상,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와 행한 이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는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우리 모두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

 

<강론초록2>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루가 18:1-8)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신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단순히 ‘끈질긴 기도의 효력’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맥락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은 하느님나라의 도래, 곧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의 태도’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무슨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종말론’은 세상이 언제 망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부딪혀 이 ‘세상 나라’가 산산조각 나는 소망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성공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소망을 두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 일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재판관의 ‘고약함’에 대비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강조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새겨들으라고 하신 고약한 재판관은 생각은 이러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슨 교훈이 있을까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느님도 졸라대야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씀일까요?. 또는 하느님은 일부러 지체하시며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시다가 응답하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이 교훈을 깨달으려면 우리가 머리가 아닌 삶의 경험으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고약한 재판관”은 단순히 비유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예수님 말씀을 듣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삶 속에서 고통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현실에서 나온 캐릭터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고약한 재판관 같은 인간이나 제도 때문에 치떨리게 억울한 적이 있질 않습니까? 생각하면 “하느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약한 재판관”은 바로 물신(物神)을 섬기고 기득권(旣得權)을 고수하는 “이 세상” 자체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충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바라는 것을 청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한 교회의자에 앉아서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도는 우리의 삶, 우리의 이웃과 세상에 “억울함(원한)”이 사라지도록 하느님께 “밤낮 부르짖는”일이어야 합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믿는, 이 세상에 집착 없이 의연한 믿음!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과연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