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4년 성찬례 성서정과

2014년 2월 23일 (연중7주일/ 폴리갑) 성찬례 성서말씀

 

 

2014년 2월 23일 (연중7주일/ 폴리갑 /녹) 성서말씀

폴리갑 (주교, 순교자, 스미르나, 156년경)

 

레위 19:1-2,9-18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
1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9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10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이다.
11 너희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 동족끼리 속여 사기하지 마라.
12 너희는 남을 속일 생각으로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 그것은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야훼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 빼앗아 먹지 마라.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마라.
14 귀머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에게 악담하거나 소경이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앞에 걸릴 것을 두지 마라.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라. 나는 야훼이다.
15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마라. 영세민이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겨레 가운데서 남 잡을 소리를 퍼뜨리지 마라. 이웃을 죽을 죄인으로 고발하지 마라. 나는 야훼이다.
17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18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시편 119:33-40

33 주여, 당신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르치소서. ◯ 그대로 지켜 상급을 받으려 하옵니다.
34 당신 법을 깨우쳐 주시고 그 법 따라 살게 하소서. ◯ 마음을 다 쏟아 지키리이다.
35 나의 기쁨은 당신의 계명에 있사오니 ◯ 그 길을 따라 곧장 살게 하소서.
36 내 마음을 잇속에 기울이지 않고 ◯ 당신의 언약으로 기울게 하소서.
37 헛된 것에서 나의 눈을 돌리시고 ◯ 당신의 길을 걸어 생명 얻게 하소서.
38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주신 약속을 ◯ 당신의 종에게 지켜 주소서.
39 당신의 결정은 은혜로우시니, ◯ 그 몸서리치는 모욕에서 건져 주소서.
40 당신의 계명을 나는 갈망하였으니, ◯ 정의를 세우시어 이 몸을 살려 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3:10-11,16-23

10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11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16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18 어느 누구도 자기 기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가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서에 "1)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제 꾀에 빠지게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고 욥기 5:13. 20 또 "2)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이 헛되다는 것을 아신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94:11.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로도 아폴로도 베드로도 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마태 5:38-48

[보복하지 마라 (루가 6:29-30)]
38 "'7)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7)출애 21:24(레위 24:20; 신명 19:21).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40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가 6:27-28, 32-36)]
43 "'8)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8)레위 19:18.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주님의 지혜는 참된 사랑을 일깨우시고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아 사랑을 실천하며,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거룩함과 완전함 (마태5:38-48)

 

생각과 말과 행실이 거룩하고 깨끗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거룩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흠이 없고 완전하고 위대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압도하는 자연과 초자연의 신비스럽고 두려운 힘을 경험할 때 거룩한 느낌을 가집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볼 때나 천둥번개와 비바람의 위력을 경험할 때 또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경험할 때 우리는 거룩함에 가까운 정서를 느낍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유한하고 그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태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욕망과 죄악에 물들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레위기의 이 말씀은 매우 엄청난 요청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신 말씀과 통합니다.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란 애초에 이 세상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능력자이신 신의 도움을 빌자는 마음이 현실적인 동기입니다. 불행을 피하고 복락을 구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신의 거룩함을 신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경외감으로 보고 그 신을 달래기 위해서 제의를 드리는 것이 종교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제의를 컬트(Cult)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사건은 그들이 하느님을 그런 컬트, 곧 제의적 숭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노예살이하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먼저 들으시고 그들을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몸소 이끌어내셨다는 출애굽의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삶을 이끄시는 분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배는 단지 전능하고 변덕스럽고 두려운 하느님을 달래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과 자신들이 맺은 계약의 관계를 기억하는 내용으로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삶의 질서를 외면적으로 규율하는 율법규정의 준수, 율법체계의 추종입니다. 그리고 그 외면적인 율법체계는 인간 영성의 내면적인 변화, 그리고 판단과 행동의 내적인 동기를 형성하는 데에는 한계를 지닙니다. 율법에 의지하는 거룩함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피기 보다는 이미 고정된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의 외면적인 조건들을 판단하여 정결함과 부정함을 나누는 일이 주가 되기 쉽습니다. 외면적인 거룩함에 대한 집착은 율법을 다룰 수 있는 식자층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의 사람들이 엄격한 율법조항을 내세워 쉽게 거룩한 우리와 부정한 타자들을 구분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구분에서 온갖 위선과 정죄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스승으로서 율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가르침을 모세의 권위가 아닌 당신 자신의 권위로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규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래 의미를 심화하는 가르침입니다. 율법의 규정들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개정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밖에서 강요되는 규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 한 인간의 참된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서의 대당명제(代當命題)를 가르치신 것은 그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구체적으로 지키라고 하는 의도가 아닐 것입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지나치고 황당한 요구처럼 여겨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따를 수 있는 계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정신을 끝없이 반성하라는 요청일 것입니다. 겉으로 지키는 율법에 의지하기 보다는 우리 마음의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고 따르는가를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에 약속이 심화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 새로운 약속을 예수님은 선포하셨고 가르치셨고 마침내 당신의 가르침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 완성하십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거룩함”의 새롭고 깊은 의미를 사람들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거룩함입니다. 사랑은 약하고 더럽고 비참해 보이는 현실 가운데 그 힘을 드러냅니다. 가령 아기의 태어나는 장면은 동물적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존귀함과 아름다움이 거기 있기에 거룩한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현실이란 참혹하고 수치스럽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 거룩함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우리의 삶도 거룩한 삶이 되도록 축복하는 것이고 그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을 공급해주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예배, 특별히 전례에서 중요한 것은 정교한 규율을 따라서 정결함을 유지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령 누구는 함부로 제단에 올라오면 안되고 누구는 함부로 성작에 손을 대면 안되고 하는 규정은 전례를 함께 드리는 공동체가 약속하고 존중하는 질서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전례가 의도하는 거룩함의 기억, 거룩함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함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의 부족함을 감싸 안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 서로를 그 사랑 안에 형제자매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부서진 몸과 흘리신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단순히 법률적인 의무를 준수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하나 되고 그 사랑으로 세상으로 나가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당연히 하느님을 달래려는 컬트가 아니고 출애굽 과정에서 맺은 율법준수의 약속을 되새기는 성전제의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모두 내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감사성찬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죄악으로 더럽혀진 대신에 하느님의 사랑과 의로 깨끗해진 것이 거룩함입니다.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겸손한 자기절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거룩함은 우리 자신을 분열시키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기 전에 주님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빛과 어둠을 함께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금을 긋고 따돌리고 장벽을 세워서 그 구분됨을 거룩함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나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다름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나와 이해관계가 달라서 그를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나의 입장일 뿐입니다. 같은 기준이라면 아마도 똑같이 그에게는 내가 곧 적일 것입니다.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곱하면 플러스가 되듯이 적과 적의 관계는 실은 가장 밀접히 얽혀있는 관계입니다. 어쩌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도 보다도 정작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서로 사랑할 가능성이 큰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하고, 모두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모두 죽음의 운명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밉더라도 그도 하느님의 사람, 나도 하느님의 사람, 서로 같은 점을 찾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깊고 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찬례는 바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으로 거룩하게 해주시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은 계율에 어긋남 없이 완벽하고 완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을 기준으로 삼아 차별과 불의와 억압을 당연시 하는 세상과는 다른 태도로 삶을 살기로 우리를 구별하였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거룩합니다. 우리는 일생 물어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거룩하게 살고 있는가?*